이승현 전 | 5.13-6.2 | 갤러리 현대 윈도우 갤러리
인물_징후 전 | 5.16-6.6 | 갤러리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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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명의 작가가 참여한 ‘인물_징후’전과 이승현의 ‘Masterpiece virus’전에 나오는 기이한 인물상들은 현대의 젊은 작가들이 전통 장르인 초상화를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윈도우 갤러리에 걸린 이승현의 작품은 마치 사진관에 진열된 초상사진처럼 보이고, 전시장 한 면이 대형유리로 되어 있는 갤러리 킹의 초상화들 역시 무심히 길을 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창에 비친 이 초상화들은 바로 거울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이다. 배열 역시 특이하다. 윈도우 갤러리에서 쌍으로 배열된 이승현의 반 고흐의 초상은 분열적 인간상을 강조하는 듯하고, 갤러리 킹에서는 공간 귀퉁이에서 초상들이 삐져나오는 듯하다. 갤러리 킹의 경우, 아담한 공간에서 24개나 되는 작품을 걸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다. 동시에 그것은 벽면 중앙에 거는 그림의 관습과 관객과 눈높이를 맞추는 시점을 벗어난다. 24개의 초상화들은 결코 전체의 밑그림을 상상할 수 없는 난해한 퍼즐 맞추기처럼 뻗어나간다. 전시장 모서리로부터 나와 여러 크기의 모서리들을 맞춰 가는 그림들은 분열적으로 생성된다. 둘 다 크지 않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중심을 선회하는 위태로운 균형 감각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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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의 작품 [Masterpiece virus]는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침해될 수 없는 순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후의 명작에다 바이러스를 감염시켰다.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그려진 반 고흐의 초상들은 광기에 찬 화가의 면모를 극대화시킨다. 단색조이지만, 매우 다양한 명암의 계열로 채워져 있으며, 안으로 밖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은 방향도 형태도 예측할 수 없다. 개체의 자기동일성을 충족시키는 외곽선은 파열되어 있다. 바이러스는 숙주에 침입하여 숙주에 기생하여 증식하고, 유기체의 해체를 야기한다. 바이러스는 유기체에 침입하는 이질적인 것으로, 동일자를 위협하는 타자를 상징한다. 그의 초상들은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자기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파열된 경우인데, 이는 광기의 화가로 각인된 신화적 인물 반 고흐라는 소재와 잘 맞아 떨어진다. 반 고흐의 휘몰아치는 선은 좀 더 복잡한 방향으로 꼬여 있거나 풀려 나간다. 개체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하는 균열이 더욱 많아진다. 흥미로운 점은 반 고흐가 누구보다도 자화상을 많이 남긴 자성의 화가였다는 점이다. 이승현에 의해 번안된 반 고흐의 초상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자아의 수수께끼가 깊어지는 역설을 강조하고 있다.

갤러리 킹의 ‘인물_징후’전의 기획자는 어지럽게 배열된 이 전시의 초상들을 ‘깨진 거울들의 집합’이라고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자아를 반영하는 거울의 통합성이나 총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수십 개의 초상들은 다양하지만, 초상화에서 정체성의 백미를 드러내는 묵직한 실체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령 수십 개의 얼굴로 분열하면서 그자체가 떨어지는 눈물 같은 초상(방은겸), 인형이나 만화, 스타의 캐릭터같이 처음부터 가상성이 농후한 초상(김기용, 구명선, 신창용),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 기표로 도배된 초상(조원득, 정유미),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샛별, 지동훈), 지워져 버린 표정(이재현, 송호은), 뭉개지거나 훼손된 머리통(진형주, 심대섭)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초상화이 가져야할 단단한 자기 정체감이나 실재성이 부족하다. 외따로 설치된 거의 손바닥 크기의 작은 작품(김태헌)은 축소될 대로 축소된 개인의 입지를 드러낸다. 내부로의 응집과 외부로의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자아의식의 강인함 대신에 비틀림과 결여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부정적 초상은 기성 사회에 불만을 품기 쉬운 젊은이들의 과민한 자의식의 발로인가?

현대의 심리학은 나르시시즘에 가득한 자아의식의 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공격성이라고 지적한다. 사랑과 증오, 가학성과 피학성, 이성과 비이성은 한 몸의 두 얼굴이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아에 집착하는 편집증의 이면은 분열증이다. 무한히 확대된 자의식은 균열 역시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 두 전시의 작가들은 생물학적 개체가 심리적 자아를 거쳐 사회적 주체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찬 과정을 직시한다. 그들은 쉽사리 개인의 자기 동일성을 가정하지 않으며, 모순을 애써 봉합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순을 더욱 키워 터트린다. 그 방식들이 매우 드라마틱하다. 현대의 예술작품이 활성화되는 지점은 주체와 현실에 대한 단단한 실재감으로부터가 아니라, 모순이다. 이 두 전시에서 모순의 격전지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모순적 힘이 격돌하는 장(場)이 되는 것이다. 초상을 주제로 한 이 전시들에서 자아와 주체의 자리에 원초적으로 내재해 있는 결여와 부재는 증폭된다.

이 전시의 대다수 작품들은 내골격과 일치되는 않는 표면들로서의 초상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초상에서 얼굴 표면들은 모호한 흔적들로 뒤덮여있거나 물화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 사이의 이러한 괴리는 객관적인 무엇을 반영(사실주의)한다거나, 주관적인 무엇을 표현(표현주의)한다는 이전 시대의 미학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실재를 지시하거나 반영하는 기호가 아니라, 기표와 기의가 끝없이 미끄러지는 흔적이자 징후에 가깝다. 요컨대 반영이나 표현이 아니라, 구성과 해체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전시의 작가들은 이질성이 동질성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거나, 타자가 동일자로 회귀해야 한다는 식의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왜곡되고 병들고 나약한 인간은 치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치유를 통해 복귀되어야할 정상성의 모델에 대해, 이전 시대처럼 쉽게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의 작가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치유를 도모한다. 동질성(동일자) 자체가 이질성(타자)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후자에 몰두하는 것 역시 자아와 주체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초상화 본연의 역할에 일조한다고 할 수 있다.  
 

출전 | 주간 한국 6월 10일(22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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