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접속되는 미지의 생물체

 

                                                                                                                                               이선영(미술평론가)
 

 

유기적 형태들로 꿈틀거리는 이승현의 작품은 끝없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생물의 방식을 따른다. 그의 방식은 돌연변이적이다. 그것들은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말하듯이, 자연사와 인간사에 속하며, 동시에 천개의 탈주 선에 의해 그것들을 피해 가는 특이한 무형적 성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좌는 제한된 캔버스를 넘어서 전체 환경을 매개로 펼쳐지곤 하는데, 작가가 기거하고 작업하는 공간은 변형의 1순위가 된다. 고양스튜디오의 내부 공간은 주체에서 발원한 괴물체들이 출몰하는 스크린이 된다. 서양미술사에 등재된 유명작가의 작품에 바이러스를 심어 해체 구성한 이승현의 캔버스 작품 중에서, 반 고흐의 방을 개작한 것은 주체의 연장으로서의 공간을 표현하며, 그것이 주체의 연장인 한 무의식이 투사되는 장임을 알려준다. 그는 자신과 타자의 무의식을 지진계처럼 기록한다. 작품 [반 고흐의 방]은 붉은색 선의 다발이 모두 제자리를 벗어나 앞으로 밀려 나온다. 중력을 초월하여 붕 떠 있는 모습은 마치 심해의 공간에서 미지의 생물체가 떠다니는 이승현의 작업실과 유사하다. 일상용품과 작품들 사이, 또는 그 위에서 유영하는 괴물체들은 복잡하게 주름진 막과 촉수들로 제어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힘을 분출한다. 그것들의 기이한 형태는 이미 알고 있는 무엇으로 환원될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무의식과 몸에서 토해내듯 나온 괴물체들은 주체 자체가 다양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들은 자신이 직면한 모든 것들에 반응하고 그것들을 변형시키며 스스로도 변형된다. 현대를 둘러싼 기계적 환경은 이러한 접합과 교환의 과정에 반영된다. 그의 작품에서 끝없는 절단과 접합을 행하는 기계는 주체성의 핵심에서 작동된다. 이러한 이질적 복합체는 차이를 로고스에 흡수시키는 주체성에 대한 보편적 표상을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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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yang Studio #12                                                          Masterpiece virus 021     


 

이승현은 명확한 계획 없이 붓이나 펜을 놀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요소였지만, 명확치 않았던 이질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캔버스나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이 가지는 야생성은 무의식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무의식은 어떤 증상과 증후,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심층 심리학이나 원형적 무의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대적 사물의 표면에 떠있고 기계와 접속하며 함께 변모한다. 가타리의 용어로 말하면 ‘기계적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현대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신체와 사회적 권력의 관계망을 타고 작용한다. 가타리에 의하면, 이러한 기계적 무의식은 현실의 다양한 수준을 횡단하고 지층들을 조립하거나 해체한다. 기계적 무의식은 표상적 무의식이 아니어서, 기표적 질서에 순응하거나 그 기준에 맞추어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체의 새로운 창안이 중시되며, 그것은 미지의 대륙을 향하는 지도제작의 방식으로 구축된다. 이승현은 화첩부터 모듈의 양식까지 다양한 형식적 장치를 동원하여 단수적 개체들을 새로이 배치한다. 이 새로운 맥락에서 괴물체들은 잠재된 힘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힘의 발현은 특정한 종이나 대상을 연상시키는 재현적 선들을 와해시킨다. 기존에 있는 무엇인가를 실어 나르는 재현성은 ‘현재함’에 자리를 양보한다. 가타리의 동료 들뢰즈는 이러한 현재함을, 언제나 뒤늦게 도착하는 동일성과 비교한다. 그것은 ‘신경 시스템 위에서 직접 작용하는 현재함’과 ‘거리감을 전제하는 재현’(들뢰즈)과의 차이이다. 이승현의 작품은 재현이 아닌, 현재함을 직접 추출하려한다.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강도 높은 물질적 덩어리로서의 몸’과 ‘돌발적 흔적들’(들뢰즈)은 이러한 현재함의 증거이다. 히스테리 같은 이 돌발적 흔적들은 전대미문의 세계 질서를 낳는 싹이 된다.
                                                                                                                                          


 

 

 



의미의 바다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이승현의 드로잉은 작가의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증식해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바이러스를 닮았다. 어느 날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투하여 신체적 변화를 가져오듯이 이승현의 드로잉은 특정한 공간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장소가 갤러리든, 카페든, 아니면 어떤 창고나 주차장이든지 간에 이승현의 손길이 닿으면 일순 그 공간은 생명을 지닌 유기체처럼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빈 공간이 어떤 의미를 띄기까지에는 작가의 집요한 동작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한 곳에서 시작하여 점차 영역을 넓혀나가는 그의 드로잉 작업은 그래서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대개 흰색, 검정, 혹은 적색의 단색조로 이루어지는 이승현의 드로잉 작업은 그런 까닭에 일견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디테일한 것이 생명인 만큼,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단조롭지 않아 눈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음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업의 성격을 그렇게 이끄는 것은 이승현 특유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마치 몬스터와도 같은 이승현의 이미지들은 공포영화나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형상들을 닮았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그려나가는 기법은 마치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처럼 정박지를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는 필경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마치 배가 항로를 수정하듯이 애초에 구상한 전체의 지도를 부분적으로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머리 속에 품은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간혹 붓을 멈추고 그림으로부터 적당한 위치에 서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의미의 지도에 대한 작가 나름의 확인 절차인 것이다.

이승현의 드로잉 작업이 주는 쾌감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미세한 하나의 점에서 시작하나 점차 형태를 갖춰나가게 된다. 그것은 용을 연상시키는 어떤 기괴한 짐승일 수도 있고 해파리와 같은 연체동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무엇이 됐든지 간에 건물의 유리창이나, 벽, 천장과 같은 다양한 공간을 점유해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 방식이 꼭 바이러스의 행동을 닮았다. 이승현의 작업에서 배경의 색이 소거돼 있는 이유는 바로 그의 작업이 이차원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되 실제로는 삼차원 공간에 떠도는 어떤 물체들을 바라볼 때와 같은 지각체험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의 드로잉 작업이 가져다주는 이런 효과는 이를 바라보는 자의 학습된 지각방식에 기인한다.

그러나 유리나 벽에 그린 드로잉과 달리 사각의 패널에 그린 그림들은 정교한 계산에 의해 위치를 바꿔도 서로 연결되게끔 구상된 것이다. 이른바 ‘미확인 동물’의 가변적인 증식과정을 보여주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장소적 특성에 따라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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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의 작업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른바 고전 명화의 차용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하여 밀레의 <이삭줍기>, 반 고흐의 <자화상> 등등을 차용하여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하는 작업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최근 들어서 우리의 화단에는 명화를 패러디하는 작업이 부쩍 늘고 있는데, 이승현의 작업은 고전 명화에 대한 패러디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식의 번안에 가깝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마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나무들처럼 ‘리좀(rizhome)’과도 같은 자기증식을 꾀해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승현의 드로잉 작업은 형식은 ‘아날로그’지만 내용적으로는 ‘디지털’ 문명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것은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로 대변되는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ing)의 등장을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선형적, 비결정적, 리좀적 특징을 지닌 현대의 디지털 문명은 아이 폰이나 스마트 폰의 등장에서 보듯이, 놀라운 속도로 확산, 증식돼 가고 있는데, 이승현의 아날로그식 드로잉 작업은 이의 징후를 생생한 필치로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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