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부는 '드로잉' 재발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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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앙>(박수근,1959)
작년 11월 K옥션에서 미술가들의 종이 소품과 판화를 모아 작은 경매가 열렸습니다. 경매 참가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박수근. 평소 그림 한 점에 10억원을 호가하는 박수근의 그림이 고작 경매 시작가 4백만원에 나왔으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수 밖에요. 이날 선보인 작품은 가느다란 빨간 줄이 그어진 노란 공책 종이에 펜으로 원앙 한 마리를 그린 아주 작은 드로잉이었는데, 여러 차례 가격 경쟁 끝에 7백만원에 낙찰됐습니다. 노란 종이에 펜으로 그린 장욱진의 귀여운 드로잉도 6백만원에 팔리는 등 이날 거래된 대가들의 작은 그림 가격은 5백만원 안팎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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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레이드>(이승현) - 소마미술관 '막긋기'전 출품작
지난해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안에 드로잉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드로잉 전문 미술관이죠. 이름 그대로 미술가들의 드로잉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겠다는 목표로 활발한 기획 전시와 작품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개관전인 <잘긋기>전을 놓치고 지난 주 시작한 두 번째 전시, <막긋기>전을 다녀왔는데 조금 감동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풋풋한 드로잉들을 잔뜩 만날 수 있었는데 신선함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들의 꽤 괜찮은 실력을 볼 때, 그 느낌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죠. 그냥 밑그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몇몇 작품은 그 자체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약간 당혹스러웠던 점은 그동안 드로잉으로 인식해왔던 손그림 만이 아닌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던 겁니다. 저런 것도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소마미술관 운영위원장인 김태호 서울여대 교수는 이에 대해 요즘에는 매체가 워낙 다양해졌기 때문에 드로잉의 개념이 단순히 스케치가 아닌 완성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정의 내린다는 설명을 하더군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거칠지만 작가의 손맛과 데생 실력을 느낄 수 있는 손그림이 드로잉의 제 맛을 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영상이나 설치작품의 ‘드로잉’들도 신선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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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성호의 불만카페' 전시 풍경
또 ‘테이크 아웃 드로잉’이라는 카페이자 드로잉 전문 전시장이기도 한 독특한 공간도 점차 입소문을 타고 젊은 층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3-4주에 한 번씩 새로운 드로잉 전시가 열리고, 테이크 아웃 컵과 엽서 디자인에서도 작가들의 드로잉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드로잉이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라는 재미있는 슬로건도 내걸고 있는데요, 드로잉에 담긴 생각의 힘,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창조력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죠.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씨가 자신의 원고나 건축 설계도를 걸어놓고 관람객들에게 의견을 묻는 전시 등 이색적인 시도들이 활기차게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최근 국내에서는 작가들의 드로잉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부쩍 드로잉 전시회도 많아졌고, 미술 시장에서도 조금씩 소장 가치를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미술 시장이 커졌고, 소장가들도 많아졌다는 얘기겠죠. 사실 드로잉은 미술품 수집을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매력적인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큰 돈은 없고 젊은 작가 작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고 소장 가치까지 생각하자면 대가들의 드로잉만큼 적절한 수집 대상은 없거든요. 게다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작가의 거친 손맛이 주는 감동은 완성작에서는 절대 느껴질 수 없는 특별한 느낌입니다. 동양화에서 흔히 ‘일필휘지’라고 하죠. 한 번의 손놀림, 하나의 선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 저는 이런 느낌을 대가들의 드로잉에서 종종 받고는 합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드로잉이 주요 수집 대상 중 한 장르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그 수순을 따라가는 게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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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성호의 불만카페' 전시 풍경
드로잉이 가진 힘 중 또 하나는 젊은 작가들에게 길을 틔워준다는 것입니다. 모든 작가들이 처음부터 대작에 덤빌 수는 없겠죠. 특히 젊은 작가들은 돈이 없을 테니 큰 작업을 할 만한 재료도 구하기 힘들거고, 더군다나 큰 작업을 할 만한 작업실도 가질 수 없을테구요. 이렇게 상황이 힘들 때 조금이나마 실력을 선보일 수 있는 게 드로잉입니다. 드로잉에는 한 마디로 미술가로서의 기본기가 그대로 드러나니까요. 실제로 외국에서는 드로잉으로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가 하고자 하는 역할도 바로 그런 것이고, 미술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반응도 뜨거운 편입니다.

드로잉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는 것.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젊은 작가들에게도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겼을 정도로 외연이 커졌다는 것, 조금 더 건강해졌다는 신호라 생각됩니다. 요즘 제 주변을 비롯해서 부쩍 미술품을 감상하고 또 소장하고 하는 분들 많아졌는데요, 거장들의 대작을 올려다보며 ‘미술품 감상, 수집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세계의 일이야’ 넘겨짚지 마시고, 젊은 작가든 중견 작가든 작가들의 가장 솔직한 모습인 드로잉부터 눈여겨보시는 건 어떨런지요.


 
 
  mpc_img26.jpg    양효경 기자 [snowdrop@mbc.co.kr]
- 2000년 입사
-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침
- 2001부터 4년간 문화부에서 미술과 공연 취재
- 2005년 12월 다시 문화부로 돌아와 문화재, 미술, 패션 등을 맡고 있음

http://imnews.imbc.com/mpeople/rptcolumn/rptcol16/1503201_70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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