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사라짐, 매혹적 경계에서 부유하다.
■ 박석태_미술비평
그린다는 행위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하나는 어떤 대상(원본)을 그대로 재현하는 행위와 결과라는 의미일 테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기반을 두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자를 이데아의 그늘 속에 숨어서 그 본질에 탐닉하는 미메시스(mimesis)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후자는 목적 없는 대상의 목적 없는 창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현의 드로잉은 이 두 가지 의미의 경계점에 위치하여, 미메시스적인 선과 기법으로 새로운 변종의 생물체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린다는 행위가 예술가에게는 두 함의의 성립 이전에 그것이 추구하는 행위의 본질로서의 ‘유희’라는 개념이 전제된다. 즉 굳이 행위의 결과로서의 작품이 유일무이성(originality)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더라도, 혹은 영원성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행위를 하는 예술가에게는 그 자신이 문제 삼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쾌감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승현이 그려내는 드로잉은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있는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모두의 경계 어딘가에 조금씩 걸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일시적으로 그가 창조해낸 세계가 일정 기간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말지라도, 결과로서의 작품 이전에 행위의 흔적이라는 속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즉 일정한 시간 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행위의 본질이라면, 그의 드로잉은 사라짐으로 해서 그 자신의 당위성을 입증해 보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드로잉에 대한 그 동안의 많은 논의대로 그가 만들어내는 화면은 스스로 증식하고 뻗어나가면서 마치 새로운 생명을 확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의 독특한 작업의 방식을 보면 적이 이해가 될 터인데, 무의식과 의식 중간을 떠올리게 하는 그만의 드로잉의 가운데에 음악이 개입되어 있는 걸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하다. 드로잉과 음악이 과연 어떤 면에서 친연성을 가지는가. 두툼한 헤드폰을 통해 그 스스로도 순서와 장르를 미리 알지 못하는 음악이 끊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들리는 음악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도, 혹은 단속적(斷續的)으로 인식하기도 하며, 마침내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탈아(脫我)의 경지를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그 스스로도 시작과 끝을 인식하지 않고, 어떠한 지향점도 상정하지 않는 그의 작업 방식은 예의 무작위적인 음악의 나열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또 다시 멜로디와 리듬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진 음악이 그러하듯이 회화적 요소들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창조해내는 이름 모를 생명체들은 필시 어디에서 본 듯한 생명체의 기관들을 떠올릴 수 있는 바, 그것이 지느러미이든 비늘이든 촉수이든 어떤 의미에서건 생명을 연상하게 하는 기본적이고 함축적인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의식에 뿌리 깊게 깔려 있는 생명체에 대한 일종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단속적이고도 그럴 듯하게 조합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화(化)하게 한다. 이는 그가 재생하는 음악의 무작위성과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서, 유의미적인, 혹은 의식적인 차원과는 먼 지점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일단의 생명체들은 의식적 사유를 바탕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浮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듣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는 사실 그에게는 모두 놀이에 가깝다. 그에게 듣는 동시에 그리는 모든 행위는 원초적인 놀이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현의 드로잉을 바라보는 우리는 구태여 수고롭게 하나하나의 기관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찾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그 속에 녹아 있는 소리와 동시에 존재하는 그의 행위를 느낄 일이다. 흥겹게 그가 펼쳐 보인 세계에 들어가 함께 떠다니며 느끼면 그만이다.
Over The Stage_ paint marker on the wall_ 542(L)x555(M)x542(R)x250(H)cm_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