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아트스페이스 빈공간, 30일까지 이승현·김기대 2인전
서로를 알지 못한 두 작가가 주고받은 감각의 기록, 드로잉으로 펼쳐져
#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오해하며 살아갈까. 그리고 그 오해는 정말 실패일까.
낯선 타인에게 건넨 말이 비틀려 닿았을 때, 거기엔 오히려 어떤 새로운 감각의 문이 열리곤 합니다.
말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지만, 감정은 때때로 단어보다 멀리 갑니다.
멀고 느리고 불완전한 통신, 그러나 그 속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진심의 잔상들.
지금, 그렇게 그림이 된 한 대화를 만나게 됩니다.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7일부터 열고 있는 전시 ‘교신’입니다.
'교신' 전시 전경.
■ 서울과 제주, 서로 다른 두 작가가 주고받은 감각의 언어
이승현과 김기대, 서로 다른 지역과 창작 배경을 가진 두 시각예술가의 교류 기록입니다.
이들은 얼굴도, 음성도, 심지어 체온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서로’를 주고받았습니다.
전시는 그들이 한 달이 넘는 시간 이메일과 메모, 이미지, 짧은 편지 같은 감각의 조각들을 나눈 끝에 도달한 시각적 기록입니다. 드로잉과 오브제 드로잉 등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전시가 정말 보여주려는 건 결과가 아닌, ‘교신의 과정’ 자체입니다.
■ “완전한 소통은 없었다”.. 오해로 태어난 예술
이승현 작가는 이번 작업의 출발점을 ‘언어의 한계’와 ‘감각의 변형’, 그리고 ‘난독’(dyslexia)이라 말합니다.
이해가 아니라 오해, 전달이 아니라 비틀림 속에 오히려 더 진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드로잉은 얇은 선들로 연결된 비정형(非定型)입니다. 어떤 명확한 도상이나 개념이 아닌, 단지 한 감각이 지나간 흔적으로 보입니다.
이를 “완전한 소통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험”이라 칭하는 작가는 감각과 이미지, 신호들이 어떻게 ‘말 너머’에서 작동하는지를 탐색해 펼쳐 보입니다.
'교신' 전시 전경.
■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감각의 귀환
조각과 공간 작업을 주로 해온 김기대 작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교신에 ‘답합니다.’
작가는 “이승현 작가의 교신 방식은 예의 바르면서도 날 놓치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기쿠치로의 여름’이라는 영화 한 편은 작가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감정을 안겨줬고, 그 감각이 전시로 이어졌습니다.
언제나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다는 작가. 자연과 인간, 종교성과 공동체에 대해 묻는 조형언어를 펼쳐왔지만 이번엔 조금 더 내밀하고 감각적인 응답을 택했습니다.
드로잉은 작가에게 ‘예술이 되기 전의 예술’, 혹은 ‘해답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 현대예술에서, 잊힌 ‘느림’에 대한 예찬
전시는 오늘날 과잉된 소통과 빠른 반응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이 다시 되묻는 ‘속도의 철학’으로도 읽힙니다.
말보다 느린 감정, 순간 무의식 중의 ‘클릭’보다 무겁기만 한 손글씨, 실시간보다 오래된 반응.
이 전시는 최근 미학 담론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비정형 커뮤니케이션’ 혹은 ‘비물질적 감응’의 예술적 형식과도 어쩌면 닿아 있습니다.
오해, 망설임, 중단, 침묵.
이 모든 불완전한 요소가 예술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
전시는 그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뚜렷하게 제시합니다. 이해보다는 감각, 서사보다 관계, 재현보다 흔적에 주목합니다.
'교신' 전시 전경.
■ ‘빈공간’에서 ‘빈공간’으로.. “공간은 비었지만 감각은 가득한”
이번 전시는 2025년 제주문화예술재단 창작공간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된 ‘빈공간에서 빈공간으로’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제주 원도심에 자리한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4월부터 10월까지 8차례 전시와 5회의 작가와의 대화, 그리고 20회의 드로잉 워크숍을 통해 감각 중심의 예술 실천을 실험 중입니다.
전시 기간 중, 시각예술가인 박해빈 작가와 함께하는 드로잉 워크숍이 4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앞서 7일 윤혜진 연극연출가와 함께하는 ‘작가와의 대화’도 마련했습니다.
사전 예약제로, 예약할 경우 밤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합니다.
작가와의 대화, 드로잉 워크숍 참여도 사전 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습니다.
■ 감각의 신호를 주고받는 사람들
이승현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드로잉 기반의 비정형 형상 작업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제30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제8회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서울시립난지, 국립고양, 인천아트플랫폼 등 주요 레지던시에 참여했습니다.
자연과 신앙, 공동체를 주제로 조각·설치·파빌리온 작업을 펼쳐온 김기대 작가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재생 소재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업사이클링 및 공간 기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 중입니다.
윤혜진 연출가는 연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야기 바깥의 감각과 주변성에 주목하는 무대를 구성해 왔습니다. ‘무아(無我)’라는 이름으로도 작업하며 설명보다 감응, 중심보다 여백을 탐구하는 실험적 연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 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교신’은 그 감응의 방향을 우리 안쪽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소비되기보다는 오래 머물며 천천히 닿기를 요청합니다.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예술은 다시 말을 걸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전했나요. 지금 이 빈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교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말보다 먼저 감응하고, 이해보다 오래 남는 신호. 당신은, 그 만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