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부리는 주인은 분명 작가다. 하지만 그리기에 홀린 화가를 숙주로 삼은 괴생명체는 일련의 자가-성장을 거듭해 유기적으로 구성된 추상 혹은 반추상의 조형을 귀결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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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의〈명화 바이러스 012〉. /갤러리 잔다리 제공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갤러리잔다리에서 개막한 이승현의 개인전 〈미확인-뮤지엄(crypto-MUSEUM)〉은 2008년 시작된 '명화 바이러스(Masterpiece Virus)' 연작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반 고흐의 〈귀를 붕대로 감싼 자화상〉 등 이름난 그림을 차용했다는 점이 '명화 바이러스'의 특징이다.
작가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명화의 이미지를 한지에 투영한 뒤 바로 붓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처음엔 명화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지만, 이내 괴생명체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자라나고, 따라서 완성된 작품은 바탕으로 삼았던 원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작품의 유희적 성격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강화된다.
관객은 예의 교양서적이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보았던 명화의 기억을 소환해 눈앞에 펼쳐진 괴이미지와 비교하기 마련이므로, 작품이 전시된 장소는 곧 '미확인-뮤지엄'이라는 가상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결국 모든 유·무형의 미술관이 그렇듯, "어떤 컬렉션을 만들 것인가?"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앞으로 화가는 미술의 역사에서 무엇을 왜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이 진실한 가짜들의 미술관은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전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의 문제작 〈게르니카〉를 전유한 대형 트립티크(삼면화) 〈명화 바이러스 009〉(2010년)다. 어떤 몹쓸 병원균에 감염이라도 된 듯, 피카소의 형상들은 기묘하게 변형됐는데, 그 극적 동세는 원형의 그것을 능가한다. 〈게르니카〉를 의식하면 구상화로 보이다가도, 한참을 응시하면 추상화로 뵈고, 다시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먹으로 제작한 그림은 수묵화로 독해 되니 정신성(精神性)이 도드라지고, 주묵(朱墨)으로 제작한 그림은 종교화로 독해 되니 제의성(祭儀性)이 두드러진다. 이런 특성은 '미확인-뮤지엄'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전시는 29일까지. (02)323-4155